수도회발간도서

제1장 프랑스의 가톨릭 사상, 교회, 그리고 선교 -1

handmaids 0 1,375 2012.01.20 15:13
        먼저 선교사의 본국 상황, 그리고 본국의 교회사상과 정신문화를 모른다면 선교사들과 그들을 통해 전해진 가톨릭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믿음은 항상 뿌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프랑스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사상의 기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가톨릭 국가였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할 수 없었으며, 인권선언 이전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프랑스인은 있을 수 없었다(그러나 2%의 개신교도는 인정하였다). 1789년 프랑스에서 왕권과 교권이 분리되면서 사회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대부분 국가의 헌법과 교권에 관한 문제였다. 프랑스 정부는 모든 성직자들에게 로마 교황이 아니라 헌법에 서약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혁명은 성직자들을 반대하는 혁명이 아니라 성직자들이 정부의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혁명이었다. 이에 대해 로마는 프랑스 교회를 비판하였다.

        여기서 두 유형의 성직자들을 볼 수 있는데, 정부의 헌법을 인정하자는 성직자들과 이를 거부하고 로마에 순명해야 한다는 성직자들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 충실하겠다는 성직자들은 혁명 당시 박해를 당하고 순교하였으며, 1925년 비오 11세는 프랑스혁명 때 사형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성인품에 올렸다.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라 부르며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관상 수도원”의 불필요성을 주장하자 가르멜 수도원을 비롯한 많은 관상 수도원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789년 8월 4일, 시민들이 왕권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주장하면서 길거리로 뛰어나오자, 당시 교회나 주교단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성직자들은 지금까지 “착취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유럽의 성소위기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혁명적인 성직자들은 교회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도 모든 특권을 없애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혁명은 천 년 동안 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권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사건이 되었다. 이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사상의 중요성은 부각된 반면 공동체의 중요성은 약화되었다. 프랑스는 이제 인권과 평등, 자유를 중요시하는 개체주의 사회가 되었고 1793년 프랑스혁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영향으로 전례 달력이 현재의 시민 달력으로 대체되었으며, 개인의 신앙은 약화되었다.

        1790년대에 일어난, 혁명 지지파의 성직자들과 로마에 소속된 성직자들과의 분열은 프랑스에 매우 강한 비그리스도교화를 가져왔다. 1801~1802년 조약이라 불리는 나폴레옹Napolon과 교황 비오 7세의 협약마저도 비그리스도교화 현상을 막지 못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Bourbon(루이 18세) 왕정복고로 인해 프랑스는 1870년까지 다시 신앙부흥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1815~1830년은 프랑스 국내 선교의 부흥시대였다. 이 부흥운동은 반교권주의로 알려진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일어났다. 지금도 농촌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는 그 당시 교구사제의 부족을 채운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 증거물이다.
나폴레옹 왕권 말기에 성소가 증가되었지만, 183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부족했던 사제들의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이 시대의 한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예수성심이 그려져 있는 단기는 방데Vende의 왕정주의자의 저항을 나타낸다. 예수성심의 깃발은 비그리스도교화된 프랑스를 다시 일으켰다. 즉 예수성심 신심이 비그리스도교화된 유럽사회를 다시 한번 그리스도교화 하는 핵심적 신심으로 발전한 것이다.

    1899년 레오 13세가 예수성심께 세계를 봉헌하였다. 그 후 이 신심은 베네딕도 15세와 선교의 교황인 비오 11세에 의해 세상에 퍼졌다. 비오 11세는 이 신심을 가톨릭운동 안에서 강하게 펼쳤는데, 예수성심을 통해 가난한 지역과 비그리스도교화된 지역에 다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1920~1930년대에 델랑드 신부도 이 영향을 받아서 예수성심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비오 11세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6월의 예수성심 대축일과 연결이 된 것으로서 그리스도 왕국을 세상에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성모성심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이 신심은 그리용 드 몽포르Grignon de Montfort에 의해서 18세기에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예수성심 신심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간소화되고 약화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에는 예수성심 신심과 성모 신심에 대한 출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예전에 출판된 책들만 대부분 남아있다. 이러한 가운데 노르망디 출신인 요한 에우데스Jean Eudes 성인이 노르망디 꾸땅스에 예수성심 수도회를 창설했고, 이 신심은 노르망디 전 지역에 활발히 퍼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르망디 출신인 루이 델랑드 신부는 이미 이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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