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발간도서

제1장 프랑스의 가톨릭 사상, 교회, 그리고 선교 -2

handmaids 0 1,418 2012.01.20 15:19
        1830~1840년에 프랑스의 가톨릭 주교단과 평신도 엘리트들을 흔들어 놓은 위기를 넘어서서 같은 시대의 독일처럼 19세기 후반 프랑스 교회에는 교황지상주의, 곧 로마로 향한 민중 운동이 시작되었다. 18세기 윤리신학인 리구오리 알퐁소Liguori Alphonse 신학은 183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되는 데, 특히 많은 신도들을 고해성사와 멀어지게 한 얀세니즘의 성직자들이 적용한 고해성사 규칙을 완화하면서 고해성사의 실천적인 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얀세니즘은 17세기초 프랑스에서 나타난 교훈적인 그리스도교의 한 사조로서, 권위적이고 질투하는 하느님을 강조한다. 당시 포르-로하얄이라는 시토 수도원이 이 사상을 옹호했으며, 파스칼Pascal도 이 사상을 따르는 철학가이다. 로마는 1713년 󰡔우니제니뚜스Unigenitus󰡕(하느님의 외아들)라는 교서로 이 사상을 단죄하였다. 얀세니즘의 윤리는 매우 엄격하여 죄의식을 갖게 한다. 19세기 말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Thrse de Lisieux의 “맡김”의 영성은 성 리구오리 알퐁소와 함께 프랑스 가톨릭 사상에서 얀세니즘을 몰아내는 데 공헌하였다. 1940년대 루이 델랑드 신부 역시 파리외방전교회가 행하는 한국 사제 양성이 피상적이라며 이 얀세니즘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렸다.

        마찬가지로 1840년대부터 교황지상주의 신심이 발전되면서 중재자들인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신심과 성모 신심이 커져갔다. 당시 기적의 메달의 성모, 루르드, 라 살레뜨, 뽕멩 등지에 성모발현이 많았다. 철도 운송의 발전으로 국가 성지순례가 발전되면서 1870년대 루르드 성지순례는 예루살렘 성지순례에 비교 될 만큼 유명했다. 상본 인쇄술도 굉장히 발전하였으며, 특히 성 슐피스St. Sulpice의 상본이 유명했다. 성 슐피스는 17세기에 신학생 양성을 위해 사제회를 창설하였고, 이 사제회에서 상본을 많이 만들었다.

        게다가 비오 10세가 원했던 바와 같이, 사제들은 평신도들에게 그들의 권위를 점점 더 강요했다. 그 당시 사제들은 대부분 루이 델랑드 신부처럼 농촌에서 배출되었다. 실제로 루이 델랑드 신부는 브르타뉴 지방과 노르망디 지방 출신 사제들의 뒤를 잇는데, 1840년대 중국에서 순교한 샵드렌느Chapdelaine 복자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며, 루이 델랑드 신부는 선교를 떠나기 전에 이 복자를 예찬하는 성인공덕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선교사들은 예수성심 또는 루르드 동굴을 선교지에서 재현하면서 루르드의 성모 신심과 같은 프랑스의 신심을 선교지에 도입했다. 예를 들면, 대구의 루르드 동굴,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1854년 12월 8일 이에 관한 교의가 선포됨)께 한국을 봉헌한 것, 1890년에 명동성당을 이 성모께 봉헌한 것 등이다. 반면에 그 지역문화에 전례를 적응시키려는 노력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2차 바티칸공의회 전, 즉 19세기 중반까지는 세계적으로 로마전례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는 새로운 미사와 모국어를 사용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선교사들은 또한 건축가이기도 했기에, 대구 계산성당과 서울 명동성당 등 한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고딕식 건축양식을 도입했다.

        프랑스 교회가 황금시대를 맞이한 1870년대에 이 프랑스 신심들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산업혁명과 도시화를 맞으면서 특히 노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성을 발견한다. 비그리스도교화가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소는 계속 증가한다. 교회는 1850년 팔루Falloux법으로 인해 교육의 자유를 얻었고, 또한 나폴레옹 3세의 정치인 제2 제정(帝政)도 교회를 원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그들의 정치, 곧 질서의 정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870~1871년 프랑스를 분열시킨 파리 코뮨Commune 이후 “프랑스의 죄”를 속죄하는 뜻에서 몽마르트의 예수성심 대성당을 국가 재정으로 건축하였다. 그리고 가톨릭대학을 창설하기도 했다(1875년 법). 1875년부터 프랑스 사회는 시민 존중 사회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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