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발간도서

제1장 프랑스의 가톨릭 사상, 교회, 그리고 선교 -3

handmaids 0 1,086 2012.01.20 15:21
            여성 수도성소의 급성장(1888년 소화 데레사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할 당시 130,000명의 여자 수도자가 프랑스에 있었다)으로 여자 수도원은 아주 큰 발전을 하게 된다.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사를 제일 많이 파견한 나라이다. 19세기 후반, 1875년 정부와 교회가 분리되는 상황 안에서도 선교사들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국가는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통치했기 때문이다. 줄르 페리Jules Ferry 공화정도 간접적으로 식민지 정책에 도움을 주는 선교사들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뮈델Mutel 서울교구 주교는 프랑스 영사와 함께 고종과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교사와 정부가 같이 일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성 빈센트 드 뽈의 사랑의 딸회를 모델로 삼아 수많은 활동 수도회들이 시골에서 창설되었다. 그 수도회들은 오늘날 예수성심시녀회의 활동과 같은 활동을 하며, 지금 수녀들이 받는 그런 존경과 감탄을 받으며 존재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 교회 안에서 여자수도회의 “황금시대”를 볼 수 있다. 그 수도회들은 교육사업, 병원사업 등 모든 사회사업을 했다. 1880년대에 국가는 병원과 학교 등에 일반인을 고용하는 등 비종교화를 시도했다. 사제나 수녀들은 점차적으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병원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것은 명백한 교육 전쟁이었다.

          가톨릭 학교는 “신 없는 학교”를 단죄하고 하느님을 쫓아내면서까지 학교를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학교에서 종교교육이 없어진 후 청소년들의 자살이 늘었다고 신문에 고발하기도 했다. 나폴레옹과 비오 10세가 가졌던 협약은 끝나고, 1905년 국가와 교회의 분리는 “1905년 협회에 대한 법”을 낳게 했으며 수도회는 협회를 만들어야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수도회의 법적 상황을 약하게 만들었으며, 예수회와 같이 활동이 금지된 수도회도 있었다.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일부를 국가에 환원하라며 경찰들은 수도원에 들어가 감실을 열거나 십자가를 발로 밟는 등, 수도회로서는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교육 문제와 수도원 재산을 놓고 “두 프랑스의 전쟁”(그리스도교를 위한 프랑스와 비그리스도교의 프랑스)은 20세기 젊은 성직자들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교회는 목요일에만 교리교육을 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학교 내에서는 할 수 없었다. 한편 성직자들도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그들은 국가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것이다.

        성 빈센트 드 뽈의 사랑의 딸회 같은 사도직 수도회의 모델은 델랑드 신부의 수도회 창설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성소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다른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국가의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도 더 이상 수도자들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국가가 그 유명한 “사회보장제도”로 건강과 사회적 영역 전반에 대해 책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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