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발간도서

제1장 프랑스의 가톨릭 사상, 교회, 그리고 선교 - 7

handmaids 0 1,215 2012.01.20 15:51
    이제 델랑드 신부의 삶을 이야기하기 전에 다루어야 할 마지막 양상들을 언급하려 한다. 즉 선교사들의 양성 문제, 선교신학 문제, 그리고 교회의 선교 정책에 관한 것이다.

    방인사제 양성을 위해 세워진 베드로 사도회의 사업은 방인사제들의 발전을 위한 바티칸의 결정을 따른 것이다. 1919년 11월 30일 베네딕도 15세의 회칙 󰡔Maximum Illud󰡕에서는 방인사제들의 양성을 강조하고 선교사 학회가 있는 나라와 결속을 깨뜨리면서까지 방인사제의 양성과 조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 회칙은 세라피니Serafini 추기경과 그의 후임자인 포교성성 장관 반 로숨Van Rossum 추기경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선교 중이었던 앙뜨완느 꼬따Antoine Cotta신부와 벨기에인인 라자리스트수도회 소속 빈센트 르베Vincent Lebbe 신부가 보낸 기록에서 영감을 받았다. 교황은 선교지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 중의 하나는 “방인사제 양성과 조직”에 있다고 강조한다. “영혼들 안에 진리를 넣어주기 위해 튼튼히 무장을 해야 하는” 방인사제들은 토착민들을 선교하는 데 “보조 역할”뿐 아니라 선교사의 자리를 대신해서 신자들을 책임질 수 있는 교육과 적응된 준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선교사 사제 양성을 위하여 “이제까지 여러 곳에서 사용해 온 방법 중에 주요한 것들의 부재와 왜곡된 교육”이 있었음을 간주하여 교황은 새로운 신학교를 창설하면서 포교성성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종용한다. 이 방향은 선교사들에게 항상 좋은 반응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1926년 2월 28일, 'Rerum Ecclesiae'(교회의 직무) 회칙을 통해 다시 한번 방인사제들의 진급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선교의 교황이라 불리는 비오 11세는 이 회칙에 힘입어 방인사제들의 진급을 감행하는데, 그 결과 1926년 10월 18일 처음으로 중국에서 6명의 주교가 탄생하고, 이어서 첫 일본 주교도 탄생한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한국을 독점하고 있다가 1920년대에 와서는 메리놀회나 쌩뜨 오딜Ste. Odile의 성 베네딕도회와 같은 다른 선교사들의 도착을 보게 된다. 게다가 1930년대에 방인사제 중에 첫 주교들이 탄생한다. 델랑드 신부도 분명히 이 새로운 선교 방향을 접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러한 선교 방침이 부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나친 얀세니즘적 교육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양성을 비판했고 또한 방인사제들의 양성도 선교 신학에 맞지 않은 너무 뒤진 교육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선교사들에게 그들이 파견될 선교지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교육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늘날 프랑스 선교학의 대가인 몽차닌Montchanin이 강조한 종교간의 대화에 중점을 둔 선교학의 발전 속에서는 이처럼 미약한 양성은 생각할 수 없다.

      일본 주교 하야사카Gennaro Kijubei Hayasaka가 대구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방인사제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방인사제들의 해방 문제는 해결점을 찾게 된다. 이 때 선교사들은 완전히 추방되었다. 선교사들은 식당도 따로 사용하고, 미사도 따로 거행하는 완전한 분리를 겪게 된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델랑드 신부를 분쟁의 해결사로 부른다. 그는 방인사제들의 미숙함과 양성의 부족을 지적한다.

    이 사건으로 로마는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의 상황에서 타협점을 찾기 위해 개입해야만 했다. 마침내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와는 거리가 먼 안동 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떠난다. 결국 1962년 요한 23세에 의해 한국 교계제도(즉 선교지였던 한국은 한국 주교단으로 이루어진 교회로 바뀐다) 설립이 이루어진다. 이는 일본과 중국보다 30년이 뒤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그들의 국력과 복음화의 긴 역사로 인해 로마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로마가 한국에 교계제도를 허락하게 된 것은 그 당시 한국 사제들이 강력하게 로마에 요청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수회를 통해 17세기에 이미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여 로마는 일본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 계획이었다. 한국이 오랫동안 미지의 국가로 남아 있었던 것은 일제 식민지시대의 한국은 일본의 한 지방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4월, 교황청은 일본 사절을 맞이한다. 영국과 미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바티칸은 일본 대사를 받아들인 것이다. 대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이런 점에서 영국과 미국은 비오 12세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1942년은 “암흑의 해”라 불릴 만큼 전쟁이 치열한 시기였다. 바티칸은 일본 대사에 이어서 중국 대사도 받아들인다. 일본은 이것을 반대하지만, 이것을 통해 교황청도 고유의 정치가 있음을 세계는 보게 된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와 뭇솔리니Mussolini가 바티칸 국가의 독립을 위해 라테란 조약을 맺은 후, 바티칸은 세계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나라의 대사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은 교회의 정치 자유를 얻으려는 교황의 의지였다. 무세Mousset 주교를 사임시키고 일본 주교를 임명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상황 안에서 이유를 찾아보면, 첫째, 교회가 독립적인 정치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둘째, 교회가 일본의 압력에 양보한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바티칸도 하나의 국가이며 고유한 정치가 있기에 종교와 그리스도 신자들을 지켜야 한다고 피력한다. 교회는 국제 정치 안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교회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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