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단상

펌 : 교회가 돈 때문에 썩는 길 - 주교가 거액 기부에 매달릴 때

류현숙 말가리다수녀 0 359 2016.09.24 00:53
교회가 돈 때문에 썩는 길주교가 거액 기부에 매달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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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08  18: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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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숀 윈터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이번 주일 복음 말씀의 끝부분으로 루카 복음 14장 33절이다. 우리 주변의 근본주의자 친구들 가운데 일부는 모금할 때 이 구절을 외지 않는 것이 내게는 이상하다. 이런 가톨릭 신자들은 이혼 뒤 (국법상으로만) 재혼한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는 문제에 관해 어떠한 변화도 반대하면서, 주님께서 이 문제에 관해 (성경에) “명백한 말씀”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들인데, 그렇다면 이들은 위의 “명백한 말씀”을 외면서 성당 등에서 기금 모금을 포기하는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은, 원래 일종의 권고의 뜻이었을 것이고 지금도 분명히 그렇게 이해되지만, 돈의 부패력을 잘 가리키고 있다. 권력이나 명예 등과 같이 마음의 눈에 바람직한 것으로 어렴풋이 인식되는 것들처럼, 돈을 얻고자 하는 바람은 아무리 선의로서 기금 모집에 임하는 이라 할지라도 다 부패시킬 수 있다.

기금 모집에는 언제나 “아이쿠”(ick) 요소가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한데, 힐러리 클린턴이 클린턴 재단과 연계된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외 기부자는 당시 국무장관이던 힐러리에게 면담을 요청해 만날 충분한 자격이 있었는데, 그들이 현금을 뭉텅이로 기부한 것은 특별 대접을 바란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도널드 트럼프는 (당내 경선에서) 자기 상대에게 기부한 특수이익 돈들을 비판했는데, 문제의 본질을 잘못 보기는 했다. 진짜 문제는 힐러리나 젭 부시가 기부를 받은 대가로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특수이익 단체들은 돈을 모을 능력이 있어서 워싱턴에서 권력을 갖게 되며, 이 권력은 어떤 문제에 대한 공통된 인식 기반을 흐트러뜨리고 대신에 그 단체들이 주장하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강화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미끄럼틀에 기름칠을 하는 것 이상으로, 이 특수이익 돈의 진짜 문제는, 한 특수이익 돈과 반대편의 정책을 미는 다른 특수이익 돈이 똑같이 돈을 잘 모으면, 양쪽이 팽팽해져서 어느 쪽도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정체상태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주일 미사에서 위와 같은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돈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위험에 대해 생각했다. 주교들이 어느 정도까지 직접 모금자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과제 때문에 주교들이 부유한 이들의 생각과 편견에 어떻게 물들게 되는지 걱정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1917년에 제임스 기번스 추기경은 베들레헴 철강의 찰스 슈왑에게 그의 공장 근처에 새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땅과 돈을 기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저는 가톨릭교회, 특히 노동자들로 가득찬 곳에 있는 교회는 아주 강력한 보수주의와 덕목, 그리고 산업의 보루이어야 한다고 굳이 촉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에 있는 가톨릭교회의 기반 대부분은 거액 기부자들 덕분이 아니었다. 우리 가톨릭의 학교와 병원들에는 수녀들이 일꾼이 되었다. 빈민들이 내는 푼돈을 모아 여러 본당들을 지었고, 이 본당의 신자들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만들어 빈자들을 도왔다. 근래에 들어서야 주교가 아주 잘사는 이들로부터 모금하기 위해 자기 시간의 많은 부분을 쓰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 '살진 고양이' 캐리커처.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우리네 가톨릭 학교들은 삶을 보전하는 이들로서, 미국의 도시 곳곳 구도심에서 가난의 덫에 빠졌지만 그 가난에서 벗어날 수단으로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자 하는 가정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우리네 가톨릭 사회복지기관들은 이 나라 사회복지계에서 첫손 꼽힌다. 가톨릭이 최대의 사회복지기관인 주가 여러 곳이며,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대상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다. 만약 어떤 주교가 자기의 주교좌성당을 보수해야 한다면, 그 비용은 수백억 원에 이를 수 있다. 그 주교는 거액 기부자를 찾아야 할 것이고, 살진 고양이들을 만찬에 초대하고 몰타기사단의 단원들에게 알랑거리고, 아주 호화로운 방식으로 교섭되는 데 익숙한 아주 부유한 이들과 교제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예전의 탁발수도회(동냥하는 수도회)와 지금의 주교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다. 둘 다 구걸한다. 하지만 동냥하는 수사들은 날마다 그날 먹을 것을 구걸했다. 지금 주교는 호사스런 만찬을 열 것이다. 적어도 우아한 칵테일 파티를 열어서 헌금을 요청받은 이들이 특별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그들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고 다음 번 레가투스(국제 가톨릭 실업인회) 모임에서 연설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해야만 한다.

가톨릭 대학 이사회들은 이제 더 이상 가톨릭 고등교육기관의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살진 고양이에게서 돈을 뽑아내는 방법을 아는 이들 또는 살진 고양이들로 구성돼 있다. 나는 언젠가 그런 살진 고양이 한 명이 자기가 왜 폐교 위기에 빠진 한 구도심의 가톨릭 학교에 기금을 내기로 결정했는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거기는 문 닫을 곳이었어요. 내가 껴들어 구해냈지요. 내 말은, 학교 하나 운영하는 것이 힘들어 봐야 얼마나 힘들겠냐는 것이지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제 생각만 하는 사람이로군. 학교 하나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전혀 몰라. 그는 마치 차 한 대를 사는 것처럼 이 학교를 샀다고 얘기하고 있어.”

그것이 이제는 일반 규범이 되었다. 많은 부유층이 자신의 물질적 성공을 보면서 그게 자신의 인간적, 도덕적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보며, 자신이 더 부자이므로 당연히 자신들의 인간적, 도덕적 가치도 더 크다고 본다. 그들이 지닌 신심은 거짓이 아니겠지만 너무 좁다. 영화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에 나오는 마치메인 부인을 생각해 보라. 이 부자는 완전히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패한 집단인 액턴연구소나 네이파연구소에 접근해서 자기가 가진 편견을 정당화하고 자기들의 부와 지위를 유지하는 대안 가톨릭 사회이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들 연구소는 전 세계에서 주교들을 비행기로 태워 모셔서는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고 이들의 지적, 도덕적 빈곤을 포장해 줄 얄팍한 종교적 치장을 제공해 준다.

나는 대부분의 주교나 대학 총장들이 개인적으로 볼 때 타락한 이들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들은 더 큰 돈을 확보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부패는 다른 모습의 부패다. 가톨릭 대학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고 할 때, 그리고 대학 총장은 이를 반대하고 노조파괴 기업인들이 하는 말들을 하기 시작할 때, 일종의 도덕적, 지적 부패가 일어난다. 총장은 자기가 이사회에서 들은 것을 되풀이 말하면서 ‘새로운 사태’(노동헌장 회칙, 1891)는 잊는다. 어떤 주교가 주요 기부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또는 이런 기부자들이 경제에 대해 말하는 대로 자기도 믿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소득 불평등과 같은 사회정의 문제들을 경시할 때, 일종의 도덕적, 지적 부패가 일어난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거액을 희사하는 이들 부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축복하시기를. 하지만,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들에 정의를 실현해야 하고 이들의 존엄이 존중받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들의 (물질적) 필요뿐 아니라 이들의 주장도 한 주교의 마음 안에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이 점에서, 노동절(올해 미국은 노동절이 9월 5일이었다.) 다음날에 루카 복음에 나오는 위와 같은 힘 있는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주교인 내 벗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부자들을 아는 만큼 가난한 이들을 알려고 애쓰는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관점에 귀를 기울이는가? 당신은 가난한 이들의 삶이 교회 생활의 부분을 구성하는 것처럼 그들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대상화하고 있는가? 당신은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진정한 보화로 여기는가?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라는 말에서 현재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 보라.

(마이클 숀 윈터스는 워싱턴에 있으며 <NCR>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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